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6) 2.고향, 이제현의 개성팔경 ③ 지금마을과 연암동
수정 : 2019-11-18 06:31:07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6)
2. 고향, 이제현의 개성팔경 ③
(3) 지금마을과 연암동, 십 리 거리에서 마주친 문장가 익재와 연암
▲ 남쪽의 사미천 개울둑 - 이 길을 따라가면 지금 마을과 연암동을 만나게 된다.
이역만리들 떠돌던 이제현에게 개성은 특별한 장소였다. 나라의 수도여서 만은 아니었다. 개성은 이제현의 하루하루가 새겨진 일상의 공간이었다. “지난해 용산의 국화꽃 피었을 제, 손님과 함께 술병 들고 산에 올랐나니”처럼 개성팔경에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이 그려진다. 그에게 개성은 도성일 뿐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다. 그런 이제현의 흔적이 돌연 수 백 뒤 쓰인 ‘열하일기’에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은 중국을 여행하며 불쑥 이제현의 옛집 이야기를 꺼낸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 지금리 도리촌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이요, 구택에다 서원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박지원. 「열하일기 피서록」 중에서)”
▲ 사미천 상류(구글어스)
연암이 말한 도리촌은 현재 개성 동쪽 장풍군 십탄리다. 열하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박지원의 별장 연암골과 이제현의 옛집이 십리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고려와 조선 최고의 문장가가 수백 년을 넘어 한 곳에서 만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장소가 멀리 중국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일찍이 <익재집>을 읽고 나서는 단연코 익재의 시를 2천 년 이래 우리나라의 명가로 여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우아하여 우리나라의 침체된 습관을 시원스럽게 탈피하였는데, 발자취가 이른 곳마다 모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 한 번 고북구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박지원. 「열하일기 피서록」 중에서)”
▲ 민족백과사전 개풍시 지도
박지원은 이어서 이제현의 발자취가 담긴 시편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붙인다.
“고려의 이익재와 같은 이도 비록 서촉, 강남 땅을 두루 밟았으나, 새북에야말로 이를 길이 없었음은 사실이다.(박지원. 「열하일기 환연도중록」 중에서)”
자신이 이제현보다 나은 부분이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사이로 십리 거리를 산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난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졌던 이제현의 타향살이는 침체된 습관을 탈피하고 위대한 작품을 낳는 계기가 됐다. 반면 작정하고 떠나온 박지원은 누구도 밟지 못했던 새북에서 침체되어 이르지 못한 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와 거작 ‘열하일기’를 완성한다.
▲ 장풍연암골 (구글어스)
고향과 타향, 머물고 떠남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들의 정신을 높은 데로 이끈 것일까? 조용한 마을을 떠나 대륙을 향했던 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로 우뚝 섰다. 연암골과 지금마을은 휴전선과 지척 거리 북쪽에 있다. 임진강 지천 사미천 작은 시내에 연이어 있는 시골마을이다. 다시 개성팔경을 쓴다면 사미천 여울을 제1경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그 흔한 팔경이 비무장지대에 생긴다면 한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팔경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미 이곳은 너무나 특별한 장소가 돼 버렸다. 이곳에서는 또 다른 고향과 실향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대륙으로의 탈주와 새로운 정신의 분출을 고대하고 있다. 고려의 이제현처럼, 조선의 박지원처럼, 오늘의 누군가가 여기에 나타날지 모른다. 모두가 잠든 차가운 밤, 문을 열고나서는 누군가가 여기 있을지 모른다.
“종이 이불 썰렁하고 등 침침한데/ 어린 중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네/ 자는 손 일찍 문 연다 꾸짖겠지만/ 암자 앞 눈 쌓인 소나무 보려고 나왔네.(이제현. 「산중설야」)”
이재석 /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저자
#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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